본문 바로가기

Faith

[생각하기]영생과 구원에 집착하는 특정종교들

교회 아닌 교회

고등학생 때 친한 친구가 가끔씩 자기 교회로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저도 신앙을 막 시작 한 때라서 내가 섬기는 교회가 소중했었습니다. 그 친구는 자기 교회는 진짜 성경대로 예배하고 성경대로 신앙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안것은 우리 모두가 군대를 다녀오고 삶을 진지하게 대할 때 입니다. 한 친구가 함께 갔다가 말도 안되는 교육을 받았다고 했었고 가둬놓고 세뇌와 비슷한 교육을 계속 해서 뛰쳐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아니라 기독교라고 할 수 없는 유사종교(?)였습니다. 믿는 대상이 그리스도가 아니고 특정 인물입니다. 물론 학창시절을 같이 보내기도 하고 정말 성격이 잘 맞았던 친구 였기 때문에 종교를 떠나 절친한 친구로 지내긴 했습니다.

그 친구는 같은 신자랑 결혼하고 직업도 종교에 묶여서 제대로 잡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장 젊고 꽃다운 시기에 종교에 묶여 더 넓은 세계로 나오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서로 결혼하고 가정이 생기며 자연스레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종교나 정치색이 달라도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이 있긴 한데 이 친구 스스로 그 틀에 갇혀 연락도 잘 안되고 친구모임도 뜸해지다 이젠 연락도 안되는 상황이 됩니다.

 

 

 

교회라는 타이틀, 그런데 그리스도가 없다?

유사 종교의 특징은 특정인물이 구원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 전체를 부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 전체는 그리스도를 이야기 하는 것인데 그것을 하나 부터 열까지 재해석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종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역할을 축소하거나 큰 의미로 여기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는 그 종교에서 깊게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3년 사역의 의미, 구약에서 부터 예견된 그리스도의 오심, 그리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는 전부 그 종교의 지도자로 바뀝니다. 그러기 위해선 성경을 전부 뜯어서 짜맞춰야 합니다. 성경은 추상적이거나 비유로 된 것이 많아 얼마든지 그릇된 짜맞춤을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그리스도는 중간 단계의 인물이고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립니다.

 

 

 

성경공부, 교육

제가 청년때도 취업난이 심각했습니다. 그 때 IMF의 영향이 컸고 기업들은 채용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취업을 위해 여러 회사의 면접을 봤는데 그중 대기업의 상표를 딴 다단계 회사들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대기업 협력업체에 취직 된 줄 알고 출근을 했습니다만 금방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회사 사무실은 없고 여기저기 교육장만 많습니다. 그리고 회사 제품들이 박스로 쌓여있었습니다.

 

모든 회사는 신입 교육을 시킵니다. 회사 업무에 적응시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교육을 통해 '업무'를 배워 나갑니다. 그러나 다단계 회사는 개인이 얻을 수 있는 소득 구조를 교육시킵니다. 내가 고객을 유치하고 그 고객이 따른 고객을 유치하는 식으로 계속 고객을 늘려나가야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꼬여있는 수익구조를 납득시키기 위해 회사는 교육을 시킬 수 밖에 없습니다.

특정종교들은 성도가 되기 전에 교육을 필수로 받아야 합니다. 일반 교회에서 새가족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성경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하며 그 원리와 해석을 교육합니다.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성경을 파편화 시켜서 재조립하는 하는 교육인것 같습니다. 즉 그 종교들을 믿기위해 교리와 원리를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을 하기 위해 교육을 받고 성경공부를 하고 이것을 달달 외어야 할까요?

 

 

 

믿음의 시작은?

출애굽 당시 불뱀에 물렸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셨습니다. 구리뱀을 만들고 쳐다보면 산다고 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의 사건을 상징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3:14-15)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택하신 방법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결단입니다. 두뇌의 이해능력, 교리를 아는 지식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를 부르실 때 "나를 따르라"가 전부입니다. 공부를 통해 신앙을 깨달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알게 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놀란 이유는 베드로는 평소에 성경과 율법을 공부하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의 설교는 누구보다도 해박한 지식과 함께 권위와 위엄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성경어디에도 그리스도를 믿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고, 깨달음은 성령이 주신 것입니다. 신앙은 복잡하게 시작하지 않습니다.

 

 

목적은 오로지 낙원과 영생

교회를 다니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교회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모여 공동체를 이루며 복음전파, 그리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원을 향한 통로인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자기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 사명은 각각의 은사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특정종교를 믿는 이유는 '구원'입니다. 여기서 믿는 구원은 이 세상을 떠나 낙원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기도 하고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으므로 자기의 비전과 꿈과 희망이 퇴색됩니다. 오로지 구원에 매달리고 1020년 뒤의 삶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종교에 빠져 가정이 망가지는 이유입니다. 이들에게 구원은 곧 영생을 의미하고 나만 선택받는 다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내가 사는 터전을 부인하고 하찮은 것으로 여기니 삶의 목적이 모호해 집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빛과 소금이 되라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천막기술자였고 스스로 벌고 자족할 능력이 있었으며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의 인물들 어느 누구도 세상의 터전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리는 천국은 어떤 모습인가요?

 

 

맹목적인 헌신 - 그리고 부작용

특정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어마어마할 정도로 헌신합니다. 모든 인생을 종교에 쏟아붇습니다. 구원자의 선택을 받기 위한 목적, 나만 선택받았다는 생각, 얼마 안있을 심판 등 동기는 명확합니다. 그들은 직업, 친구, 가정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맹목적인 헌신으로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열심으로 하는 것은 '포교''헌금'입니다. 믿음이 우선이라 비전을 갖지 못하고 미래를 향해 가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계발, 목표, 시간관리, 자녀교육, 내집장만 같은 것에 힘을 쓰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종교에 전부 줍니다. 그것은 돈과 시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좋지 않은 부작용은 사회적 고립입니다. 종교외에 다른 모든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친구를 만날 일 없고 포교외에 인연은 전혀 의미없는 것입니다. 사회적 만남이 적어지니 사람간의 교류가 적어집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제 친구들의 모습의 변화를 보게 됩니다. 청년 때 출발선은 비슷했습니다. 학벌과 성적의 차이가 있었으나 그것이 절대적인 요소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교를 믿었던 친구는 공부도 잘하고 학벌도 좋았음에도 자신만의 비전을 향해 나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5-6년쯤 지나고 친구들은 저마다의 포지션에서 서서히 시작하였고 점차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공무원, 개발자, 기업임원, 회사대표, 선생님 등 친구들은 서서히 사회의 주축이 되었지만, 그 친구는 연락도 뜸하고 모임도 잘 안나오더니 이제 연락도 되지 않고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이따금씩 제 친구의 사례 외에도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대체로 제친구의 모습하고 비슷하였습니다. 가정이 무너지고 연락, 교류도 없어지고 종교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어떤 종교도 인생을 불행하려는 목적을 가지지 않습니다.

 

 

교회는 구속이 아니라 참된 자유를 얻는 곳

교회를 다니면 비전을 꿈꾸고 진취적으로 세상을 살아갈 동력을 얻습니다. 말씀, 예배, 교제를 통해 참된 자유와 기쁨, 위로와 평안으로 우리는 하루를 더욱 보람차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120년의 날(사실 많아야 90년이겠지요)을 생각하면 우리는 하루 하루를 귀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를 다닌다고 모두가 이런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교회에서 성도님들을 붙잡아두거나 맹목적인 신앙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성도간의 미움과 비난, 프로그램 참석의 강요, 남의 신앙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은 교회에서 없어져야 할 부분입니다.

 

모임보다 예배, 참석보다 올바른 누림이 정착되어야 교회가 더욱 좋은 모습을 갖출 것입니다.

올바른 신앙으로 속박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누리길 권합니다.